밥 길이 짓고, 민구홍이 옮기고, 작업실유령에서 펴냄.

소개

그래픽 디자이너 밥 길의 독특한 그래픽 디자인 교재, 전기적 작품집, 또는 다른 무엇

“그래픽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교육자, 아트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겸 엉터리 재즈 피아니스트” 밥 길이 써낸 이 책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디자인 교재다. 길은 30여 년 동안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며 터득한 제 디자인 방법론을 관련 작품과 함께 조목조목 정리하고, 단호하지만 격의는 없이 소개한다. 책은 1981년 출간되자마자 당시 길이 가르친 파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를 비롯해 미국 안팎의 디자인 학교에서 교재로 쓰이고, 그 뒤에도 미국의 대표적 상업 디자이너 마이클 베이루트(Michael Bierut)에서 한때 (그렇지만 여전히 실체를 알 수 없는) 더치 디자인의 선봉에 선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익스페리멘털 젯셋(Experimental Jetset)까지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길이 솜씨 좋은 디자이너기 때문만은 아니다. 책은 디자인 이전에, 앞표지에서부터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낼 만큼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당면한 문제가 형편없다면? 문제 자체를 편집하는 수밖에

길은 주어진 일감을 ‘풀어야 할 문제’로, 디자인을 ‘문제를 푸는 과정’으로 여겼다. 이 당연한 접근법에서 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길은 “연필을 들기 전에” 문제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문제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점을 찾아낸 다음 그 점이 드러나게끔 문제를 ‘편집했다.’ 디자인 기술을 구사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길은 문제만 ‘제대로’ 편집한다면 답은, 다시 말해 디자인은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었다. 그리드를 몇 단으로 짜고, 타이포그래피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이 아니라 오직 문제를 어떻게 편집했는지에 길이 책 대부분을 할애한 까닭이다. 여기에는 ‘갑자기 떠오른 영감’ 같은 게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길은 출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상식이 된 ‘문제에 답이 있다’는 격언을 제 식대로 실천했을 따름이다. 실천은, 암송하기만 해도 마감이 닥친 과제를 해결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는 학생에게 용기쯤은 줄 듯한, 경쾌한 장 제목을 따라 이어진다.

“이 책에 실린 것까지” 잊으라며 스스로를 얄궂게 부정하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책은 디자인 교재로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가 30여 년에 걸쳐 제 손을 거친 작품을 주제에 맞춰 선별한 점에서 영국의 디자이너 겸 디자인 책 수집가 제이슨 고드프리(Jason Godfrey)가 그래픽 디자인 도서관(Bibliographic: 100 Classic Graphic Design Books)에서 규정하듯 전기적 작품집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길의 작품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 줄 세우는 건 공연한 일이다. 길의 초기작과 최신작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작 일자를 보는 것이다. 10대와 20대 시절 길은 세계적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뒤이은 냉전과 베트남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지만, 그의 작품에는 현실계와 자못 다른 시간이 흐른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건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함이나 시치미를 떼고 던지는 (때로는 고약한) 농담, 일요일 아침 같은 느긋함이다. 물론 이런 점을, 길이 런던을 떠날 즈음 영국에서 종영한 시트콤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나 뉴욕에 돌아온 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형편없이 흉내 내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먼(Andy Kaufman)의 모습과 겹쳐 보는 건 독자 마음이다.

인공 신경망의 시대, 그럼에도 곱씹어 볼 만한 디자인의 고갱이

오늘날 디자인 과정은 일찍이 길이 주로 활동한 시대와 달리 컴퓨터와 전문 소프트웨어 몇 개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간소화됐다.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는 디자인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고, 디자인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구글을 과외 선생 삼아 어렵지 않게 디자인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 이를 부정하는 건 ‘정식으로’ 디자인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뿐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의사소통’이라는, 소프트웨어 매뉴얼이나 구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디자인의 고갱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출간된 지 40년 가까이 된 책이 설파하는 교훈은 여전히 곱씹어 볼 만하다. 제목이 제안하듯 책에 실린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성실한 독자뿐 아니라, 그 제안마저 또 다른 규칙으로 거부해 규칙을 하나하나 따라 보기로 마음먹은 영리한 독자에게도.

추천사

책 속에서

차례

  1. 문제가 문제다.
  2.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3. 생각 먼저, 그림은 나중에.
  4. 도둑질은 좋다.
  5.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
  6. 적을수록 좋다.
  7. 많을수록 좋다.
  8. “전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했어요.”
  9. 찾아보기, 연도, 협력자, 주석.
  10. 밥 길
  11. 주요 저서
  12. 옮긴이의 글

지은이와 옮긴이

밥 길(Bob Gill)

그래픽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교육자, 아트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겸 엉터리 재즈 피아니스트.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필라델피아 미술관 부설 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디자인과 드로잉을 공부했다. 시각 예술 학교, 왕립 미술대학, 파슨스 디자인 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디자인 회사 펜타그램(Pentagram)의 전신 플레처/포브스/길(F/F/G)을 세웠다. 뉴욕 아트 디렉터 클럽 최고상을 받고,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런던 아트 디렉터 협회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를 포함해 디자인 전문서 밥 길, 지금까지., 그래픽 디자이너를 위한 특수하지 않은 효과 등과 그림책 계속 변해요, 위아래,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개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연주회 등이 있다. 2021년 11월 9일,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구홍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미국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시적 연산을 공부했다.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한 한편, (레인보 셔벗 향기를 풍기는)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운영하며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한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에서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코딩을 가르친다. 저서로 새로운 질서가, 옮긴 책으로 이 책을 포함해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개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연주회 등이 있다. 2022년부터 안그라픽스 랩 디렉터로 일한다.
https://minguhong.fyi
@minguhong.fyi

옮긴이의 글

원래 문제: 옮긴이의 글. / 다시 규정한 문제: 보도 자료로도 쓸 수 있는 옮긴이의 글.

“그래픽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교육자, 아트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겸 엉터리 재즈 피아니스트” 밥 길이 써낸 이 책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디자인 교재다. 길은 30여 년 동안 몇 가지 직업을 거치며 터득한 제 디자인 방법론을 관련 작품과 함께 조목조목 정리하고, 단호하지만 격의는 없이 소개한다. 책은 1981년 출간되자마자 당시 길이 가르친 파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를 비롯해 미국 안팎의 디자인 학교에서 교재로 쓰이고, 그 뒤에도 미국의 대표적 상업 디자이너 마이클 베이루트(Michael Bierut)에서 한때 (그렇지만 여전히 실체를 알 수 없는) 더치 디자인의 선봉에 선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익스페리멘털 젯셋(Experimental Jetset)까지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길이 솜씨 좋은 디자이너기 때문만은 아니다. 책은 디자인 이전에, 앞표지에서부터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낼 만큼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길은 주어진 일감을 ‘풀어야 할 문제’로, 디자인을 ‘문제를 푸는 과정’으로 여겼다. 이 당연한 접근법에서 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길은 “연필을 들기 전에” 문제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문제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점을 찾아낸 다음 그 점이 드러나게끔 문제를 ‘편집했다.’ 디자인 기술을 구사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길은 문제만 ‘제대로’ 편집한다면 답은, 다시 말해 디자인은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었다. 그리드를 몇 단으로 짜고, 타이포그래피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이 아니라 오직 문제를 어떻게 편집했는지에 길이 책 대부분을 할애한 까닭이다. 여기에는 ‘갑자기 떠오른 영감’ 같은 게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길은 출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상식이 된 ‘문제에 답이 있다’는 격언을 제 식대로 실천했을 따름이다. 실천은, 암송하기만 해도 마감이 닥친 과제를 해결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는 학생에게 용기쯤은 줄 듯한, 경쾌한 장 제목을 따라 이어진다.

“학창 시절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y)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 책은 우리에게 곧바로 영향을 줬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길이 한결같이 쓰는 ‘문제와 해결책’ 방법론이었다. 이는 구식이고, 단단하고, 일차원적이고, 교훈적이고, 고풍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해결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완벽한 해결책이란 건 없으니까. 이런 비극성이 스민 방법론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까닭이다.”—익스페리멘털 젯셋

“이 책에 실린 것까지” 잊으라며 스스로를 얄궂게 부정하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책은 디자인 교재로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가 30여 년에 걸쳐 제 손을 거친 작품을 주제에 맞춰 선별한 점에서 영국의 디자이너 겸 디자인 책 수집가 제이슨 고드프리(Jason Godfrey)가 그래픽 디자인 도서관(Bibliographic: 100 Classic Graphic Design Books)에서 규정하듯 전기적 작품집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길의 작품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 줄 세우는 건 공연한 일이다. 길의 초기작과 최신작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작 일자를 보는 것이다. 10대와 20대 시절 길은 세계적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뒤이은 냉전과 베트남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지만, 그의 작품에는 현실계와 자못 다른 시간이 흐른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건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함이나 시치미를 떼고 던지는 (때로는 고약한) 농담, 일요일 아침 같은 느긋함이다. 물론 이런 점을, 길이 런던을 떠날 즈음 영국에서 종영한 시트콤 몬티 파이선의 날아다니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나 뉴욕에 돌아온 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형편없이 흉내 내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먼(Andy Kaufman)의 모습과 겹쳐 보는 건 독자 마음이다.

오늘날 디자인 과정은 일찍이 길이 주로 활동한 시대와 달리 컴퓨터와 전문 소프트웨어 몇 개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간소화됐다.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는 디자인 교육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디자인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뜻만 있다면 구글을 과외 선생 삼아 어렵지 않게 디자인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 이를 부정하는 건 ‘정식으로’ 디자인을 가르치고 배워 온 사람뿐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의사소통’이라는, 소프트웨어 매뉴얼이나 구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디자인의 고갱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출간된 지 40년 가까이 된 책이 설파하는 교훈은 여전히 곱씹어 볼 만하다. 제목이 제안하듯 책에 실린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성실한 독자뿐 아니라, 그 제안마저 또 다른 규칙으로 거부해 규칙을 하나하나 따라 보기로 마음먹은 영리한 독자에게도.

(이 문장을 포함해 뒤에 이어지는 보도 자료로 쓸 수 없는 내용은 괄호로 묶는 게 낫겠다.

이 책을 처음 안 건 2008년 무렵이다. 한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초판 앞표지만 본 게 고작이었지만 첫인상은 퍽 강렬했다. 첼트넘[Cheltenham]으로 조판한 큼직한 문장은 부러 권위적으로 보였고, 제목에 마침표가, 그것도 두 개나 찍힌 모습에서는 형식과 체계에 예민한 편집자나 사서를 슬며시 골탕 먹이려는 꿍꿍이도 엿보였다. 장난꾸러기 친구를 만난 듯했다.

정작 책을 손에 쥐고 내용을 들여다본 건 2012년쯤이다. 그로부터 4년여 뒤, 내용을 잊을 만할 즈음 뉴욕에서 잠깐 학생으로 꽤 여러 번 책과 스치고, 한국에 돌아와 또다시 만났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인공 신경망 번역기 덕에 사전을 들춰 가며 헷갈리는 단어나 구절을 확인하는 수고를 얼마간 덜었다. 물론 앞뒤 문맥을 따져 길의 능청맞은 어투를 살리는 건 근엄한 인간의 몫이었지만, 섣불리 상상해 보면 가까운 미래에는 그마저, 심지어 옮긴 후기를 쓰는 일까지 컴퓨터가 얼추 갈음할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구글의 관련 팀을 포함해 책을 펴낸 워크룸 프레스와 스펙터 프레스의 모든 분, 특히 번역하고 편집하는 동안 ‘디자인으로’ 조언해 주신 최성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017년 4월
민구홍)

판권

  •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 밥 길 지음
  • 민구홍 옮김
  • 작업실유령 펴냄
  • 2017년 5월 25일 초판 1쇄 발행
  • 210 × 280밀리미터
  • 176쪽
  • 사철 하드 커버
  • ISBN 978-89-94207-79-7 03600
  • 22,000원
  • 편집: 민구홍
  • 디자인: 슬기와 민
  • 도판 디지털화: 황석원